필자의 꿈은 원래 음악치료사가 아니었다
전공인 피아노를 하기 전의 꿈은 작곡가, 오케스트라 곡을 만드는 클래식 작곡가였다.
처음 작곡가의 꿈을 꾸게 된 계기는 막심 므라비차(Maksim Mrvica)라는 크로아티아 출신의
크로스오버 피아니스트란 사람을 알게 된 이후였다. 이 분을 알기 전까진 피아노라는
악기를 칭한다면 개인적인 편견이지만, 클래식만을 다루고 고고한 사람들만 하는 음악
혹은 음악을 듣기엔 좋지만 직업으로썬 가난한 환경이란 인식 그리고, 당시 어린 나이에
꿈이 이상적이고 창의적인 게 아닌 돈 많이 버는 직업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갖고
있었다. 처음 막심을 알게 된 곡은 <Croatian Rhapsody> <Flight of the Bumble Bee>였다.
분명 곡의 프레임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인식과 다르게 전혀
졸리지 않고 트랜디했다. 뭔가 접근성이 낮은 클래식 오케스트라 보다 더 대중적인 느낌?
클래식 애호가들은 비평할 테지만 뭔가 그 당시의 유명한 곡을 현대 시대에 맞춰 재해석 한
느낌이 되게 인상적이었고 나도 저런 곡을 만들어 보고 싶단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 생각을 하기 전까지의 난 피아노란 악기를 다뤄본 적이
없었다. 사실 한 번도 다뤄 본적 없단 건 거짓말이지만, 유치원 때 피아노 학원 일 년 정도
다녔었다. 그리고 이후 초등학교 2학년이 될 방학 즈음에 개인적인 사고로 인해 한동안
악기와 멀어졌고, 그 당시 약일 년 병원에 입원하면서 살았었다. 그 당시의 난 생존이
우선시 된 상황이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지 못할 치료 과정과 심리적인 요소들이
피폐했었다. 매주 반복되는 찢고, 자르고, 지지는 치료 과정은 살면서 내가 그 나이에
겪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지만, 누구에게 말하고 싶지도 말하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야
말하게 되는 이유는 현재의 난 이제 그러한 모든 걸 극복했다고 생각하고 한평생 부정적인
마음에서 긍정적인 면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병원 내에서 환자들을
대상으로 제주도로 요양차 가족등반 여행을 하게 해줬던 일이 있었다. 그때 당시 나보다
더 심한 환자가 있었다. 심지어 그 아이는 나보다 2~3살 어리던 친구. 난 부분적인 상처지만,
그 아인 전신이 상처였다. 충격이었다. 난 나보다 심한 사람은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 애도 그 아이는 밝고 긍정적이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상처는 모르는 듯했다.
그 아이에게 말을 걸면 언제나 웃으면서 말을 했다. 타고난 사교성인 건지 병원 내에서
그 애랑은 금방 친해졌는데, 덕분에 병원에서 하는 치료가 아프지 않았다. 그 아인 나보다
더 심하지만 늘 웃고, 언제나 뛰어다니면서 행복해 보였기에, 나도 티를 내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그 당시의 참는 습관이 지금의 강인함을 만들어준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난 약일 년간의 입원을 마치고 초등학교를 다시 등교를 시작하기로 했다. 사실 부모님은
이제 막 치료를 마친 것도 아니지만, 언제까지 입원을 할 수도, 학교를 안 갈 수도 없고
나이대에 맞게 학교를 그래도 가야 잘 살지 않겠나 라는 생각을 했다. 당사자는 더 잘 알고
있었다. 나도 사실 당시 걱정됐다. 외향적인 요소 때문에 학교생활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까,
더 미뤄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하지만 그냥 다니겠다고 했다. 그렇게 학교생활을 몇 달
지내면서 좋은 친구도 생겨서 학교 수업 시간 중간에 째(?) 서 근처 문방구 가서 오락실 내에
서 백 원짜리 게임하고 놀다가 선생님께 혼나기도 하고 부모님이 학교 찾아오기도 하고
뭔가 그 때 당시에 힘들었던 심리들이 많이 완화되었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면 사고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가 보고 싶다. 만약 사고가 안 났을 때의 난 어땠을까? 궁금증이 있다..
하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법. 사고는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지만. 그런 경험과 시간들이
지금의 날 만들어주고 음악치료를 공부하게 만든 계기였을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초-중학교 땐 그렇게 두루두루 아이들도 착해서 잘 지냈었다. 나름의 불량 생활도 해보기도
하고, 먹고 싶은 것도 먹으러 다녀보기도, 해보고 싶은 것들도 다 해보고 재밌었다. 하지만
그 당시 살면서 꿈이 특별히 없었던 것 같다.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면 소방관이던 경찰,
대통령 등 뭔가 창의적이고 재밌는 직업이나 하고 싶은 거 한 가지 이상씩 떠올려봤을
텐데.. 다른 친구들한테 너 나중에 커서 뭐 되고 싶어? 하고 물어보면 다들 미약하나 재밌는
답변들이 나오는데 정작 나는 그러한 답을 내려본 적이 없었다. "난 커서 OO 될 거야!"
라는 생각을 왜 한 번도 안 해봤을까. 그렇게 꿈 없이 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집이랑 좀
떨어진 곳으로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는데, 여기서도 나름의 생존전략을 짜야만 했다.
이제 머리 좀 크고, 사춘기인 나이에 어떻게 기죽지 않고 나름 잘 살아갈 수 있을까란
생각을 그리고 여기서 제2의 터닝포인트가 있었다. 여기서 피아노를 다시 하게 되는 계기가
생긴다. 난 일반 인문계 고교에 진학했다. 꿈은 없었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고등학교
진학해서 대학교 아무 데나 가면 그래도 남들처럼 돈 벌고 의식주 해결하는 데엔
문제없겠지 하면서 마침 고등학교 진학 후 반년이 지났을까, 2013년 6월에 학교 내에서
고교단 합 합창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는 그 당시 음악 전공 출신 교장선생님께서
학생들의 학업증진과 향상을 위해 계획하셨다고 했는데, 누구나 참가할 수 있고 하지만
모든 반은 참가를 해야 한다는 사항이 있었다. 예고도 아닌 일반 인문계 고교에서 합창대회
를 한다는 것이 궁금하기도 재밌을 것 같단 생각도 했다. 당시 반 배정은 홀수 반
(여자 반), 짝수 반(남자 반) 이었는데 여자애들은 이런 거 참 계획을 잘하는지 곡 선정이나
무대연출 등 참 체계적으로 잘 정하고 추진을 하는 것 같다. 이왕하는 거 우리도 잘 하면
좋겠다만 어떻게 된 게 우리 반은 이런 쪽으로 잘 추진하는 아이들이 없었다. 반 대표 중
한두 명은 대회 담당자 역할도 해야 하는 상황. 남자애들이 그런 거 자처나 할까..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필자 반은 자원자가 없으므로 반 번호순으로 결정하기로
했다. 당시 학업 번호 1번이었던 필자, 대회 담당을 맡게 되었고 대회 참가곡을 정해야 했다.
다행히 의견은 별의별 이야기들이 나왔다. MR로 댄스곡으로 하자, 힙합 하자 아니면
반주해서 하자 등 그런데 의견 중 피아노 반주로 대회 나가자 란 의견이 대다수가 나오게
되었다. 담임선생님 또한 찬성했다. "MR로 하는 것보다 반주로 했을 때 더 정성이 들어가니
점수를 더 잘 받겠지 않겠냐"란 의견. 나 또한 찬성하고 괜찮은 아이디어지만 결국 반주
는 내가 해야 하는 건데,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피아노란 악기를 다루지 않았었다. 하지만
반 아이들은 내가 음악 하는 학생으로 알고 있던 것 고등학교 입학 당시 각 반에서 서로의
자기소개를 하게 되는 시간이 있었는데 악기도 안 다루던 내가 나중에 꿈이 "작곡가"라고
말을 했었기 때문에, 쟤는 음악 하는 애구나라는 인식이 박혔었다. 하지만 곡과 주제는
확정되었고, 난 큰일 났다란 생각을 했다. 대회까지 앞으로 40일남은 상황에 어떻게든
확정된 곡의 반주를 완성을 해야만 했다. 난 근처 학원 아무 데나 등록하기로 했다.
다행히 그 곡에 대한 난제를 학원 선생님께선 "한 달이면 충분하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피아노 처음인 내가 보기에 한 달 만에 될까란 의심이 들었었다. 하지만 어쨌든 닥친 일
눈 딱 감고 일단 연습을 해보기로 한다. 그 당시 준비한 곡은 <사랑과 우정 사이> 원곡
피노키오의 <나는 가수다>라는 방송에서 김경호, 김연우 분 들이 부르신 버전으로
준비를 하게 되었다. 하필 가요라 코드 진행도 어려웠다. 무엇보다 내가 연습해도 애들이랑
맞출 수 있을까라는 생각.. 처음에 음표도 볼 줄 몰라 연필로 음 계이름 적고 손가락 번호
적고 엇박은 연필로 그려서 맞추는 연습하고 그래도 노력을 해서 그런 지 한 달도 아닌
20일 만에 손에 숙지가 되었다. 그렇게 좀 익숙해지고 학교 내 음악실에서 방과 후 30분
이상씩 대회전까지 반 아이들과 연습한 결과 합창대회 당일 순위권은 아니지만 인기상을
받게 되어서 과자 박스 2개를 왕창 받아 서로 수고했다고 반 책상 가운데로 모아서 과자
풀어서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 보면 서로서로 맡은 역할에서 열심히 해서 나름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성취감을 느꼈었다. 합창대회가 끝난 이후 난 고민이 생겼다.
현재 다니는 피아노 학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대회곡 때문에 임시로 다닌 학원이었지만,
이왕 다닌 거 계속 다녀야 할까? 어떻게 할까? 당시 삼촌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작곡가 하려면 피아노가 기본이다" 맞는 말이다. 신시사이저도 다루고 하려면 필수라고
생각. 일단 학원에서 바이엘을 처보기로 한다 바이엘, 체르니 처보면 재미가 너무 없었다.
내가 클래식을 하는 건지 작곡을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작곡을 하려면 작곡 학원을
다녀야 하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일단은 다녀보기로 했다. 그래도
피아노에 재미 붙이기 위해 클래식이던 재즈, 팝, 락 등 다양한 음악을 들어보기로 했다.
피아노 학원에 다닌 지 반년쯤 됐을까 하농과 가요곡에 지쳤을 때 새로운 곡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쇼팽의 곡을 연습해보자, 처음 접근한 쇼팽 곡은 <혁명> 이었다. 클래식 중에
많이 들어보았고, 왼손 패시지가 필자의 작곡 스타일에 맞기에 연습하기로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순탄하지 않아 고생했다. 그렇게 클래식과의 사투 끝에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게
되었다. 대학입시, 나는 피아노 과로 가야 하는가 작곡과로 가야 하는가 고1 때 피아노를
시작한 이후, 약 2년이 지난 고3이 된 시점에 나는 피아노는 부단하게 연습했다만 작곡을
공부하지 않았다. 따로 나름 공부했다고 생각했지만 입시 수준으로 공부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대학교는 가야 하는 상황에 난 피아노 과로 진학하기로 다짐했다. 수시를 보고
떨어지고, 정시에 서울권 대학교 한 군데와 지방 근처 대학교 한 군데를 지원했는데
둘 다 붙었다. 그리고 보통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서울권 대학교 진학을 하는 게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버지와의 상의 끝에 결국 지방권으로 진학하게 됐다.
난 본 대학교 결정에 매우 많은 불만과 사유를 아버지께 댔다. 필자 曰 "어느 누구한테
물어보세요 이 선택은 정상이 아니고 미쳤다고 합니다"라고 했다. 그에 반대로 아버지는
"이제 막 피아노를 약 2년한 놈이 서울권에 날고기는 놈들한테 싸워서 이길 수 있겠냐,
근처 학교 가서 실력을 쌓아서 사회 진출할 때 기반을 만들어라"라고 말을 하셨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고1 때 시작한 피아노.. 운으로 서울권 대학 붙었다고 해도
그 사람들과 악기 싸움으로 이길 자신도 없었다. 그리고 기본기가 많이 부족했기 때문에,
반발을 더 할 수 없이 진학했다. 그렇게 난 대학교 새내기가 되었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된
나는 캠퍼스 낭만을 즐길지 공부를 할지 고민했다. 그래도 한 학기는 놀아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후회할 것 같다란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서 두 개다 같이하기로
했다. 하지만 둘 다 병행하는 건 여간 쉽지 많은 않았다. 한 학기는 학업에 증진하면서
조금씩 놀다가 유흥에 유혹이 생겼었다. 하지만 미래에 후회할 것을 생각해서 피아노에만
매달리기로 했다. 그리고 난 16년 10월 국제 콩쿠르로 진출하는 콩쿠르를 한번 나가보기로
결정했다. 예선이 수원에서 열렸었는데 한번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해보자 해서 준비했다.
그 당시 라흐마니노프의 <Prelude Bb Major Op.23 No.2>를 연주했는데 운이 좋았는지
본선 1차로 가는 티켓과 함께 다시 한번 콩쿠르의 기회가 찾아왔다. 10월 중순에
서울에서 열린 본선 1차도 무난하게 했었던 것 같다. 당시엔 베토벤의 Variation과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했었다. 이때도 운이 좋았었는지 입상과 본선 2차로 가는 티켓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마지막 11월에 열린 본선에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을
연주했는데 2위 입상과 독일 진출을 하게 되는 통보를 받았다. 이날은 정말 나에게서
잊을 수 없었던 날이었다.. 2017년, 대학시절 활동성이 많은 시기였다. 더 많은 콩쿠르와,
연주회, 봉사활동 등 음악인 으로서의 액티브한 삶을 추구하기로 했던 것. 특히 악기로
봉사활동 다녔었던 게 제일 인상 깊었었는데 나의 삶의 질이 달라지고 주축이 내가 아닌
남을 위한 행동을 하는 것이 내면적인 성숙함과 또 다른 나를 알게 해주는 듯했다.
내가 한창 치료받던 어린 시절에 나는 "나약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야"라는 인식이
강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를 좀 더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에 나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위한 행동을 하고 싶었다. 그들이 현재 처한 상황을 막상 대면했을 때
난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심지어 그러한 삶 속에서도 어린 시절 병원에서
같이 지냈던 아이가 떠올랐다.
그 아이처럼 웃음을 잃지 않는 자폐와 발달장애, ADHD 등을 앓고 있는 사람들..
누굴 돕기 위해 했던 봉사활동이 날 깨닫게 만든 공부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17년 8월 드디어 독일 국제 콩쿠르에 진출하게 되었다. 16년 11월의 마지막 본선 이후
9개월 뒤 독일 베를린에서 콩쿠르를 맞이하게 됐다 이 계기가 나를 음악인으로써의 질을
높여주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나보다 더 수준 높은 사람들과, 독일이란 낯선 땅의 문화와
환경 등을 느끼게 해주었다. 콩쿠르 진행 중 나이가 어린 한 한국 초등학생 여아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수준이 정말 달랐다. 뭔가 나와 다른 세계 같은..
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야무지게 어려운 대곡을 연주하는 게 소름이 돋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나와 수준 차이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래서일까 일찍이 음악을 왜
시작하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저런 아이들이 나중에 크면 어떤 사람이 될지..
애초에 전문 연주가의 꿈은 져버리게 됐다. 내가 출국한 이후 우리 동네가 홍수로 물바다가
됐다고 부모님께 사진을 한 장을 받았다. 살면서 우리 동네가 이렇게 물이 잠길 정도로
됐던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거 참 기이한 일이다. 그런데 한국에 다시 입국하니 햇빛이
짱짱한 날로 돼있더라 그렇게 다시 시차 적응하고서 학교생활 매진하면서 피아노 처대니
나라에서 불렀다. 이제 군대를 가라는 소리, 콩쿠르 갔다 왔는데 면제 안 시켜주나? 란
생각했지만 내가 나갔다 온 콩쿠르는 해당사항이 전혀 없었고, 1위 또한 아니었기에..
그래서 나는 강제로 끌려가지 않고 차라리 내 발로 가겠다 해서 해병대에 자원했다.
어떻게 됐는지 이번에도 운이 따른 건지 해병대의 군악대에 합격이 되었다. 그래도
군대에 있어도 악기를 계속 다룰 수 있다는 큰 장점 덕분에 행복하게 복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먹여주고 재워주고 월급 줘도 군대이건 군대인 것.. 집에 못 가는 게 너무 슬펐다.
군악대에 있다 보면 사회에서 다양한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을 맞이하게 됐다. 오케스트라
파트는 물론 기타, 보컬 등 군악대 특성상 의장대와 함께하는 일들이 많은데, 서로 부대의
주특기를 따라 하는 문화가 있었다. 의장대들이 사용하는 M1 소총 돌리는 것을 우린
빗자루나 K-2 소총을 돌리기도.. 서로 상부상조 재밌게들 복무했다. 체력단련실 가면 늘
의장대 들은 있었다. 의장 간부님들과도 친해져서 운동하는데 꿀팁 같은 것도 전수받았다.
2019년 9월 25일, 부대에 한 연예인이 왔었다. 누구나 아는 그룹 샤이니의 그분
수복 행사차 부대에 파견 온 것인데 타 부대는 물론 우리 부대 내에서도 관심사였다.
나 또한 신기했다 행사 준비차 행사곡 반주를 도왔던 사례가 있었는데, 문득 그분이 왜
해병대에 지원했는지 궁금해서 물론 본 1사단에서 지겹도록 많이 들은 질문이겠지만
"육군보다 해병대가 더 멋있고 강해서"라고 답을 했었는데, 누가 봐도 형식적인 답변
이었지만 부대 내에서 얼마나 고생할지 눈빛이 읽혔다.. 그러한 형식적인 질문을
뒤로하고 개인 연습실에서 연습하던 때 그분이 피아노 반주 도와주실 수 있냐고
들어왔었던 날이 있었다. 물론 도왔다 행사를 위함이니까 한창 반주를 하던 중 그분이
질문했다. "해병님께선 피아노 치는 게 즐겁습니까?" 난 너무나 당연한 질문을 하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에 그분은 "피아노 치는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도 물어봤다 "민호 해병은 행복했던 적과 슬펐었던 적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난 후자도
질문했다. 그분은 머뭇거리더니 "행복했던 적 있고 슬펐던 적도 있었다"라고 답했다.
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파견 온 연습실에 있던 시간만큼은 얘기를
자주 나눴었던 기억이 난다. 군대에 있는 동안 몇 명 해병들과 두루두루 잘 지냈었다.
물론 트러블 있었던 사람도 있었지만 부대 내 지내면서 병사들 의견 조율이나 들어주는
역할 등의 중재적 역할을 많이 했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의 비밀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해결과 답을 제시하진 못하지만 그들이 선택의 길을 정해주는 도움을 주기도
했었다. 그래서 고마움과 보상(?) 등을 얻기도 했다 20년 군 전역 이후에 나는 다시 한번
인생의 선택을 할 때가 왔다. 나는 복학을 했고 현실적인 면을 계획하고 실천할 때가 된
차에 코로나19가 2월에 공식적으로 발표가 되었다. 그렇게 복학 아닌 복학을 인터넷 강의
로써 맞이하게 되면서 삶의 활력이 무기력하게 바뀌게 됐다. 한창 학교 다닐 땐 학교
다니기 싫다 이랬는데 이 상황을 맞이하니 학교가 얼마나 좋은 곳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학교에서의 수업이 사라지고 모두가 집에서만 있다. 사람이란 활동적인 동물이 통제와
제한을 받으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깨닫게 되었다. 경제순환은 거품이 되고 있고 각
나라들의 재정은 점점 열악해지고 있는 상태.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까지도 진전이 될 것
같으면서도 안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이 없었다 그저 내 할
일에 충실할 뿐.. 이러한 상황에서도 난 나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난 나중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자격증을 공부해야 할까? 아니면 남들처럼 기술이나 토익공부를 해야 할까?
솔직히 말해서 내가 이런 기술이니 뭐니 다 준비를 한다고 해도 미래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고 취득한 자격증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고, 그렇다 해도 남들 다 준비하는데
나도 해야 되는 거 아닐까..? 싶기도 한 현재의 답답한 심정 누구에게도 말 못 하는 나 혼자
만의 싸움이다. 그래서일까 확실해졌다.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길을 걷는 수밖에 나는
인생을 길게 살아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생의 절반은 치료와 음악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현재 나는 치료를 15년 동안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이제는 뭐 덤덤하다 아픈 것도 그저
그렇고 아직도 치료를 받는 내가 누군가를 치료하는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이 가끔
들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난 스스로에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내가 치료를 받고 고통을
알기 때문에 다른 내담자들을 더 공감하면서 치료를 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미 난 음악치료를 내가 인지하지도 못했는데 치료를 스스로 받았다.
보통 어린 나이, 큰 사고를 당해 장애나 후유증 등 이 있는 경우 나이를 먹고서도 그
트라우마가 대부분 잔존한다. 다행히 당시 초 중학교 시절 좋은 사람들과 선생님들을
만나 스스로가 나쁜 길로 갈 수도 있었던 상황을 방지할 수 있었고 그리고, 고등학교 때
시작한 피아노란 악기가 정서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날 건강하게 만들어줬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음악치료를 불신하거나 잘 모르는 이들에게 나의 경험에 빗대어 잘 얘기할
수 있다. 난 살아오면서 내 스스로를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인간이기에 어느 정도 그러한 부분은 있다. 누군가를 이기고 싶어 하고, 기회주의를
갖는 것 등 하지만 생각보다 살아오면서 난 남을 위해 돕는 일들을 많이 해온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를 위한 자기계발을 하고 있지만 결국 그 발전한 결과물들은 정작 남을
위해 사용했었다. 난 인생을 길게 산 건 아니다. 하지만 난 삶의 목표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에 대한 신념은 생겼다. 나의 음악으로 사람들을 치유하는 것. 음악으로써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을까란 막연한 생각을 하던 와중 음악치료 관련 학교가 있단 걸 뒤늦은 때
알게 되었다. 사실 늦은 것도 아니다 이제 시작이니까 일단 관련된 지식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음악치료 정의와 심리학, 정신학, 철학, 즉흥연주 등 생각보다 할게 많았다.
각오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이란 게 확실히 그런 게 있다. 아무리 쉬워도 하기 싫으면
안 하고 싶고, 아무리 어려워도 하고 싶으면 이 악물고 한다 나도 약간 그런 부류인가
보다. 코로나 때문에 현재 학교는 못 가는 상황이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고 있고, 목표가 있기 때문에 나는 힘들지 않다.
쿠느(Kunuman)_구 한 호(Ku han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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