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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_

과거의 카페 분위기와 현재의 분위기

과거 2019년 말까지의 카페 모습과 현재의 카페 분위기를 보면 마치 기원전

 

기원후를 보는듯한 느낌이다. 마스크 하나로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것이 실감이 된다.

 

카페뿐만이 아닌 전체적인 사람들의 분위기와 활동성, 감정들이 많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분위기는 많이 차분하고 얌전해지며 거리에는 몇 년 전과 확연히 달라진 건 둘째치고

 

 

 

감정 표현 또한 과거에 비해 그렇게 밝은 이미지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많이 조심스러워진 표현들과 폐쇄성이 1년 이상 지나고 나니 눈에 띄게 보인다.

 

이제는 우린 얼굴 면적에 ​50%​ 이상을 차지하는 마스크가 어떤 사람에게 없으면 그 사람을

 

부정적으로 보는 안타까운 시대에 적응해버렸다. 오히려 당연함이 부정이 돼버렸다.

 

 

 

사회적뿐만이 아닌 국가적 환경 또한 부정적으로 변해버렸다. 당연함이 당연함이 되지 않고,

 

결백함이 결백함이 되지 않으며, 순수함이 순수하지 않는 삶이 돼버린 것이다.

 

우린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를 숨어있는 저격수 속에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이다.

 

현재 죽음의 의미는 신체적임보다 정신적 죽음의 의미가 더 커져버린 시대가 되었다.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일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버렸다.

 

오히려 안일해졌달까? 과거에 필자는 성선설(性善說)을 믿었었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최대한 긍정성과 인간의 선함을 믿어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필자 또한 ​성악​(性惡)을 간접 해보고 행동했음에 ​성선설​을 믿지 않게 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다. 옛날에 선생님들은 "인간은 혼자일 때 (善) 하며,

 

둘 이상 일 때 (惡)으로 변한다"라고 하셨다. 난 이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비록 오래 살진

 

않았지만 ​선​과 ​악​이 표정과 행동으로 보이게 되었다. 이 사람이 나에게 행하는 표정과

 

행동이 읽히기 시작했다. 즉, 사람을 나도 모르게 계산적으로 평가하고 거르는 행동의

 

 

 

(惡) 한 행동을 하게 돼버린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한다. 난 애초에

 

이 의미는 모순적이라고 생각한다. 동물이란 한자풀이 그대로 움직이는 생명체이다.

 

그리고 그 동물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선 움직임을 할 수 있도록 동력을 보충해 주어야 한다.

 

그 동력은 식품이고 살생을 통해 얻어진다. 하지만 그러한 살생은 현재 식품으로써의

 

 

 

살생이 아닌 동족끼리의 살생이 되어버렸다. 사회적이란 의미는 같은

 

동족과 어울림에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살생을 하는 우리 인간들을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지칭할 자격이 있을까. 하위계층의 말 하지 못하는 동물들은

 

자기 가족들만을 챙긴다. 그러면서 생존을 위해 하위 생명체를 살생하며 생존해 나간다.

 

 

 

하지만 인간은 동족마저 살생했다. 그러한 동물인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지칭의 자격이

 

없다. 필자가 오랜만에 카페에 나와 과제를 하고 포스팅을 하며 느낀 카페의 분위기는

 

동족 살생으로 인한 사회적 동물의 지위를 잃어버린 인간의 민낯이지 않을까 싶다.

 

-Kunu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