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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과 경험

뮤지컬 <파가니니>, 비운의 시대에 태어난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2024년 4월 20일 토요일, 국립중앙박물관 극장용에서 뮤지컬 <파가니니>를 관람했다.

 

배우들의 뛰어난 가창력과 파가니니의 악마적인 기교력, 물론 프로 예술가들의 무대였기에 당연했지만,

 

너무 잘한다는 감탄을 금치 못 했다. 특히 파가니니 역을 맡았던 KoN 배우의 연주 실력이 훌륭했다.

 

니콜로 파가니니,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가난한 부모 밑에 태어나 노름하는 아버지와 그를 아끼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왔고, 아버지가 노름판에서 바이올린을 구해온 것이 파가니니의 음악적 시초가 되었다.

 

부모는 파가니니의 음악적 조기 교육을 위해 선생에게 맡겼으나 단기간에 스승을 능가하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의 기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천재성은 그에게 있어 한편의 비극으로

 

찾아왔다. 노름하는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파가니니는 수많은 공연을 하며 공연 수익금(프랑)을

 

 

 

아버지에게 바치는 유년기를 보내왔다. 이러한 유년기가 실이었는지 독이었는지 모를 만큼 파가니니의

 

연주력은 당시 다른 연주자들과 비교해 보아도 뛰어난 기교력과 표현력을 갖게 되었는데, 그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그의 음악에 매료되기도 하고, 미치기도 했으며, 한편으론 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얻은 연주력이 아니냐는 망언과 오인이 오가기도 했다.

 

 

 

 

니콜로 파가니니, 그의 유년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광적인 연주력의 근간은 당시 그의 집안 사정에

 

있었다. 광적인 연주를 하지 못하면 노름하는 아버지의 빚을 갚지 못해 밥도 먹지 못하고 물도 제대로

 

마시지도 못했다. 어쩌면 그는 유년 시절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쌓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사랑했던 샤롯 드 베르니에, 그녀는 고리대금업자 아버지의 아들이자 카지노 파가니니의 지주인

 

 

 

코랭 보네르의 약혼자였다. 하지만, 샤롯만이 파가니니의 음악을 진정으로 좋아해 주었고, 그의 상황을

 

알게 된 그녀가 유일하게 그는 악마가 아님을 인정해 주었다. 어쩌면 파가니니의 유일한 구세주였을지도

 

모를 여인이었다. 하지만 말년, 니콜라 파가니니는 급속한 성공의 자만감으로 인해 그의 아버지처럼

 

도박에 빠져 바이올린을 잃는 일까지 생겼고, 1840년 5월 27일 결핵으로 향년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이었던 아킬레 파가니니는 본인의 아버지 니콜라 파가니니의 시신을 프랑스에 안치 시키지

 

못하도록 막는 교회의 반대를 몇 십 년 만에 설득하여 남프랑스 니스에 안치할 수 있었다.

 

결론, 한 사람의 인생은 주변 환경과 사람들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더군다나 대중보다 특별하다면

 

말이다. 그의 연주력의 재능을 악마에 비유치 않고, 금전적 족쇄에 가두지 않고, 그를 그 당시 그저

 

 

 

다른 예술가보다 뛰어난 실력의 연주자로만 인정하여 자유로운 예술가로 두었다면 그의 별명이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었을지 않았을까

 

 

 

 

 

Curtain Call.